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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및 전설 원효불기(元曉不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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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2 댓글 0건 조회 7,769회 작성일 18-05-15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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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다. 조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내내말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의 남쪽 지금의 장산군밑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은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명칭에 대하여는 민간에서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아기를 가져 이미 만삭인데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밤나무 밑에서 문득 해산하게 되었다. 몹시 급하였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사라수라고 한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이를 사라율이라고 하고 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니 괴상히 여긴 관리는 그 밤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는데, 한 알이 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까닭에 밤나무골이라고 했다.
스님은 출가하자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라고 했다. 또 사라수나무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라 했다. 스님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할아버지의 본거를 따른 것이고, 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사람이라고 했다.

살펴보건대 인덕 2년 사이에 문무왕이 上州와 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를 두었는데,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이요,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현이다. 상주는 지금의 尙州이니 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에 속해 있으며 바로 압량군에서 나누어진 곳이다. 스님의 아명은 서당(새돌이)이요,또 다른 이름은 신당이다.
처음에 유성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태기가 있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온 땅을 덮었다. 때는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617)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이 없이 혼자 공부했다. 그의 유방(遊方--중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행함)의 시말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자취들은 당승전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올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쓰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스님은 어느날 풍전(風顚-상례를 벗아난 행동)을 하여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어느날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지내고 있었으므로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이미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오고 있어 만나게 되엇다. 원효는 이때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스님을 궁으로 데리고 그 곳에서 묵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여 신라 10현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방언으로 중국과 외이의 각 지방 풍속, 물건이름 등에도 통달하고 이회하여 6경과 학문을 훈해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명경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이를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여 총을 낳은 후에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스님은 그 모양에 따른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無碍人(부처를 이름)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문귀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 했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로 말미암아 상추옹유(가난한사람의 집),확후(몽매한 사람)의 무리들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부을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원효란 이름도 역시 방언이며 당사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원효를 일러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항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을 끝으로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訟事로 말미암아 몸을 百松(몸이 백개의 소나무로 나뉨)으로 나누었으므로 모든사람들은 이를 位階의 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유로 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를 지었으며, 붓과 벼루를 소의 두뿔위에 놓은 연유로 각승이라했다. 이것은 또한 本始二覺(본각과 이각)의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 또한 知音하여 서로 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진용을 만들고 분황사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사모하여 終天(한평생 슬픔을 품음)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곁에서 예배할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 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거하던 穴寺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다.
        각승이 삼매경의 축을 처음으로 폈고,
        무호는 종내 1만거리를 바람으로 걸었네
        달 밝던 봄 요석궁에 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모습만 비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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